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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물의 모양새: 허수인의 작업에서 수집되어 정리된 내적 관계

 

콘노 유키

1. 수집과 정리: 내적으로 긴밀한 관계로써

 

수집하는 것과 정리하는 것은 서로 다르지만, 긴밀한 관계를 형성한다. 뮤지엄(미술관/박물관)을 떠올려보자. 뮤지엄은 미술사적 가치를 판단하여 분류하여 보여주는 곳인데, 이때 수집과 정리는 동시에 이루어진다. 수집과 정리의 결과가 시각적으로 제시되어, 우리는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유물이나 미술품을 본다. 뮤지엄에서는 수집과 정리가 가능한 한 밀착되어 있다. 수집할 때 심미적 또는 사회 문화적, 미술사적 가치가 기준으로 자리할 때, 정리가 이미 된 상태나 다름없다. 미술관에 어울리지 않을 법한 일반인의 손목시계나 사진도 한 시대를, 그 소멸된 과거를 기억하기 위해서 소집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뮤지엄을 벗어나면 수집과 정리의 긴밀한 관계는 서로 멀어지는 듯 보인다. 예컨대, 수집은 나만의 기준—어쩌면 기준으로 세워지지 않은 기준에 따라 서랍에 보관된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공개할 수도 있지만, 대체로 정리되지 않은 혼돈의 양태로 등장하기도 한다. 일상에서 수집은 정의 없이, 정리가 안 되어 있는 상태로 인식된다. 그런데, 수집한 사람이 사물 하나하나에 내력을 알고 있는 것처럼, 정리는 다른 기준으로 작동한다. 바로, 사물과 내가 관계를 맺으면서 심리적 안정을 얻는 행동이 된다.

 

수집한 이것이 무엇인지, 수집한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볼 때, 수집한 자의 내밀한 취향보다는 내적/심리적 투영이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수집의 방은 분더카머(wunderkammer)처럼 ‘우주의’ 조화를 그려나갈 수도 있는데, 이는 주변 사물에 마음을 (그야말로) ‘빼앗기듯이’ 수집하는 일부터 대체로 출발한다. 사물에 매력을 느낄 때, 그 재료나 시기, 역사적 평가로 분류하는 것과 다른, 이해심과 심리적 안정을 (되)찾는 과정이 정리의 기능이다. 그것은 수집하는 사람이 ‘내적’ 조화를 추구하는 한 형태이다. 사물의 내력을 간직할 때, 타인의 온기나 나 자신의 과거라는 부재하는 현재에 우리는 마음을 빼앗기고 이를 수집하고 보관한다. 남이 보기에 혼돈스러워 보이지만, 이는 내밀한 미술 소장품이 취향으로 설명되는 것과 다른 설명이 필요하다. 남이 보기에 혼돈스러운 사물은 알고 보니—보이지 않지만, 본인에게는 이해심의 내력이 담겨 있다. 그것은 각각 다른 내력, 즉 과거의 경험을 간직하지만, 한 사람의 안정을 가져다준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허수인의 개인전 《Collected Connection》(2023)에서 강조된 점은 이전 작업과의 연장선상에, 그의 작업이 수집과 정리의 내적 관계를 설치 작업을 통해서 추구하는 태도이다.

 

2. 내면과 함께 있기: 사물과 사물의 이면에서

 

전시장에 있는 장갑, 출력된 이미지, 문서들은 전시 제목에 반영된 것처럼 작가가 그간 수집한 것들로 이해할 수 있다. 정렬된 배치에서 몇 개의 사물만 강조된 <Archaeology of Three Moons>(2020)나 <The Lure of the Ordinary>(2020)와 달리, 《Collected Connection》에서는 전시장에 수많은 작고 큰 물건들이 들어와 있었다. 그렇다고 이 모습은 혼돈을 보기 어렵다—오히려 날것이다. 트레이 안에 사진 자료가 보관되어 있거나, 길쭉한 형태는 설 수 있게 안정을 취하고 있다. 혼돈과 날것은 시간축이 같지만, 다른 모양새를 띤다. 혼돈은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다가 나나 누군가에 의해 어지럽힌, 혹은 아예 처음부터 정리가 다 되지 않는 두 상태를 가리킨다. 날것은 아직 잘 다듬어지지 않은, 곧(/즉) 다듬어질 것이다. 동시에, 단정하게 잘 다듬어진 결과물이기도 하다. 전시장에서 사각형 모양의 스티로폼과 원단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듯이 그것은 가공되지 않은, 곧(/즉) 가공될 가능성이 잠재된 형태이다. 혼돈과 날것은 둘 다 과거 완료형이나 현재 완료형 시제를 띤다. 무슨 행위나 행동이 벌어진 후에 형태가 없어지는지 아니면 형태가 잡히는지에 따라 모양새가 달라진다. 허수인이 기성품을 바탕으로 전개하는 설치 작업은 혼돈이 아니라 날것이며, 내적으로 다듬는 이해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전 작업에서도 허수인은 기성품 물건을 선반이나 테이블형 좌대 위에 올린 적이 있다. 허수인에게 수집이란 물건을 모으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미술 창작에서 창조와 기성품을 결합한 레디메이드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머릿속에 있는 것을 빚어내거나 만들어내는 창조와 달리, 레디메이드는 기성품을 가지고 온다. 창조의 반대항으로 볼 수 있는 레디메이드이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물의 맥락이며, 그 맥락을 어떻게 재위치시키느냐에 있다. 규격적으로 생산되고 가치가 동일하게 맺어지는 상품들 사이에서, 그 상품 안에 차이는 수집을 통해서 마음을 빼앗긴 내력이 각자의 시선으로 새겨질 때 비가시적으로 부여된다.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에 기반한 이야기가 사물들과 이들의 배치를 통해서 그려질 때, 우리가 허수인의 작품에 보는 것은 물건에 비친 작가의 마음가짐이다. 우리는 작품에서  모든 에피소드를 파악하기 어렵다. 그 이유는 작가가 사물, 무엇보다 기성품을 통해서 다른 사물과 구별하여 본인의 내면을 아로새기기 때문이다. 그 하나하나가 배치를 통해서 제자리에 있는 것은, 그 뒤에 작가의 심리 상태가 다듬어진 결과이다. 유동적인 가치가 기성품을 둘러싸서 시대와 사회에 따라 바뀔 때, 본인의 내면만큼 거기에 사물과 같이/함께 있는 것도 없다.

 

 

3. 나나 타인의 초상: 다듬어지면서 세워지는 축

 

<Archaeology of Three Moons>에서 작가가 설명하는 세 개의 달—얼굴, 가로등, 보름달은 연인과 헤어질 때 작가의 눈에 비친 것들이다. 전시장 안에는 파열이나 균열 대신 배치의 고요함이 보인다. “연인과의 관계는 약속으로 이루어지며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질서”[1]라고 설명하는 바를 따라서 이해하자면, 이 작품은 아슬아슬한 관계 위에서 유지되는, 사랑이라는 깨지기 쉬운 결실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하필 헤어짐을 겪는 순간에도 작가는 균형이 잡힌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을까? 연결의 취약성이나 파탄을 보여주는 것이 타당해 보일 수도 있는데, 그럼에도 작가가 기꺼이 균형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작별의 순간에 비로소 (인지하지 못했던) 균형이 보인다는 역설을 포착했다는 점은 물론, 세 개의 달이 작가에게 내면을 다듬는 형태로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세 개의 달은 지시하는 대상도 대상들과의 거리도 각각 다르지만, 작가의 시선을 통해서 하나의 형상으로 응축된다. 전시장에는 동그란 공과 같은 물건이 위아래로 뻗은 긴장감 있는 줄 사이에 들어와 있다. 얼굴처럼 변화를 느리게 받아들이고, 가로등처럼 가까운 곳에 빛을 보이고,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하늘에 뜨는 달처럼, 본인의 내면은 다듬어져 간 형상이다. “이별은 연인과 구축한 축이 무너지는 순간이자 새로운 축이 세워지는 순간”[2]이라고 설명할 때, 그 새로운 축이란 단순한 비유를 넘어서, 잘 이해하고자 하는 태도에서 나온 작가 본인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세상에 둘도 없는, 가장 구체적 존재인 얼굴과 상징으로 오래전부터 사용되어 온 동그랗고 빛나는 존재는 하나로 뭉뚱그려지지 않은 채 사람을, 주변을, 만나는 것들을 (그야말로) ‘입체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이 시선이 서는 자리가 바로 작품에 주어진다.

 

궁극적으로, 허수인에게 ‘연결’이란 사물들과 나[3]의 연결인데, 무엇보다 나와의 연결이라 할 수 있다. 이는 《Collected Connection》 전시장 전체를 꿰매듯 흘러나오는 사운드에서 심리상담의 대화가 들어간 부분에서 극대화된다. 심리상담사와 환자의 대화는 작가 본인의 경험에 비춘 것이며, 전시장에 배경 음악처럼 깔린다. 여기서 환자(작가)는 대인 관계에서 비롯된 고민을 풀어놓는다. 개인(간)의 고민을 또 다른 개인—상담사와 환자가 대화로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허수인은 환자라는 입장을 받아들이면서도 대화가 이루어진 진료실 바깥에 있는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시선을 보낸다[4]. 그렇게 생각한다면, 기둥처럼 서 있는 입체는 작가 본인의, 더 다듬을 수 있는 작가의 초상이자 동시에, 좋은 면(모)로써, 모나지 않게 이해한 타인(을 바라보는 나)의 초상이라고 할 수 있다. 《Collected Connection》에서 연결은 사물 간의 다양한 관계보다는 사물을 관찰하듯이 나를 위치하고 마음 놓고 보는 ‘나’라는 한 사람에서 시작한, 사람을 이해하고자 하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청각적인 요소는, 수집하는 사람이 사물에 귀 기울이던 시선에 그치지 않고, 나와 타인이라는 사람에게 귀 기울이는 내적 교감을 위한 시선이 된다. 보이지 않는 이면에, 내가 서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허수인의 설치 작업이다.

 

 

4. 무너지거나 세워지는 것의 균형 위에서

 

하지만, 궁극적으로 우리는 작가의 서사를 알지 못하고 사물들의 배치와 연결을 작가가 시도한 설치 작업을 보고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본인의 우주가 어떻게 세상이라는 우주를 이해하는 태도로 연결될 수 있을까? 하필 왜 기성품이나 덜 다듬어진 재료가 다루어졌을까? 날것을 보고, 기성품의 조합과 배치는 작가뿐만 아니라 보는 사람에게도 현존으로의 진입을 가져다준다. 조르조 아감벤이 (미적 쾌락으로만 향유하는 대신) 나와 예술품 사이에 ‘생동하는’ 힘을 들여다본 것처럼[5], 장-뤽 낭시가 예술의 종말에 실존의 기술(테크네)을 들여다본 것처럼[6], 허수인의 작품은 만드는/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실존과 현존의 기회를 마련한다. 사물과 또 다른 사물의 간격, 멈춰 있지만 각각 다른 내력을 가진 사물과 작품 안에서 흐르는 생기는, 내가 나를 떠나 타자처럼 놓였을 때[7], 그 괴리 안에서 비로소 추구된다. 낙차나 위계, 그로 인한 취약성이나 파탄의 한쪽을 대신할 일 없이, 허수인의 설치 작업은 그 사이에서 세상의 존재 방식을 묘사한다. (작가가 일상에서 경험한)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구조와 체계는 사물의 이면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 흐름을 다르게 끼워 넣음으로써 가치의 변형 가능성과 함께 가리켜진다.

 

앞서 인용한 구절을 다시 살펴보자. “이별은 연인과 구축한 축이 무너지는 순간이자 새로운 축이 세워지는 순간”이라고 설명할 때, 수집과 정리, 날것의 시제는 (앞으로의) 정립과 (이제는 다 끝난) 무너짐으로 갈라질 지점에 서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존과 현존의 ‘기회’인 괴리는 시스템의 구조에 흡수되기도 한다는 점을 잊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균형’은 작품에서 작가가 보는 세상의 변형 가능성과 체계적 구속 가능성의 저울질 사이에서 추구된다. 세상은 단순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고정관념이나 체계로 인해 언제든지 단순히 만들어진다. 동시에 그 틀이 가진 가치를 비가시적으로 바뀌는 기회 또한 있다. 이데아적 (눈에 드러나는) 표상의 문제를 고민한 조셉 코수스의 <세 개의 의자>(1965)와 달리, <Archaeology of Three Moons>는 이미지와 (눈에 드러나지 않는) 상상의 가능성으로 고정되는 틀에 맞설 수 있음을 고요히 보여준다.

 

 

 

 

[1] 작가 노트 참고.

[2] 위와 같음.

[3] 본문에 여러 번 등장하는 ‘나’는 작가일뿐만 아니라 (후술하듯이) 작품을 보는 사람, 인간 일반을 가리킨다.

[4] 이 마음가짐에 관한 내용은 작가 노트를 참고 바란다.

[5] 조르조 아감벤, 윤병언 옮김, 『내용 없는 인간』, 자음과모음, 2017, p. 142-144

[6] Jean-Luc Nancy, Les Muses, Galilee, 2002, 일역본, p. 71

[7] 앞서 설명한 <Archaeology of Three Moons>에서 작가가 세 개의 달을 봤을 때 시선을 떠올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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